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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LEET 독서/문학, 미학

헤겔과 체계 이론 미학 [2009학년도 LEET/미학]

by Gosamy 202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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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우리는 온갖 행위들이 ‘예술’로 인정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리고 이 경우 대상의 순수한 예술적 가치 이외의 다른 가치들은 논외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예술만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존립을 인정하고 타 영역의 간섭을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대변하는 대표적 예술론의 하나가 바로 체계 이론 미학이다. 루만에 의해 개척된 체계 이론은 사회 각 영역이 고유한 자립성을 확보하면서 하나의 ‘체계’로 분리 독립되는 과정을 분석하는데, 이 이론을 미학에 적용하여 예술을 독자적 체계로 기술하려는 이들은 헤겔의 미학을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단서로 활용하곤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예술에 대한 호의적인 결론을 도출하려고 끌어들인 헤겔의 예술론이 본래는 오히려 예술에 대한 부정적 결론, 즉 ‘예술의 종언’ 명제로 요약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명제가 어떻게 예술 옹호론을 위한 실마리로 전용될 수 있는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헤겔 미학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는 예술을 ‘이념의 감성적 현현(顯現)’, 즉 절대적 진리의 구체적 형상화로 규정한다. 그는 지고의 가치인 진리를 예술의 내용으로 규정함으로써 예술을 종교, 철학과 함께 인간 정신의 최고 영역에 포함시킨다. 이는 예술이 헛된 가상이거나 감성적 도취 또는 광기의 산물이어서 정신의 최고 목표인 진리 매개가 절대 불가능하다는 플라톤의 판정 으로부터 예술을 방어할 수 있는 매력적인 논변일 수 있다. 둘째, 그럼에도 헤겔의 최종적인 미학적 결론은 오히려 이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우리에게 예술은 더 이상 진리가 실존하는 최고의 방식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예술이 더 융성하고 완전하게 되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의 형식은 더 이상 정신의 최고 욕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주장이 묘한 인과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이 둘을 하나로 묶으면 ‘예술은 진리 매개가 그것의 과제이기 때문에 종말을 맞는다’가 된다. 다분히 역설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예술관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헤겔이 예술의 내용과 형식으로 각각 설정한 ‘진리’와 ‘감성’의 상관관계에 있다. 객관적 관념론자인 그는 진리란 ‘우주의 근본 구조로서의 순수하고 완전한 논리’, 즉 ‘이념’이므로, 그것을 참되게 매개하는 정신의 형식은 바로 그 순수 논리에 대응하는 ‘순수한 이성적 사유’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본질상 감성을 형식으로 하는 예술이 이념을 매개할 수 있 는 가능성은 인간 정신의 작동 방식이 근본적으로 감성적이어서 아직 이성적 사유 능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던 먼 과거의 역사적 유년기에 국한되며, 예술이 담당했던 과제가 근대에는 철학으로 이관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헤겔은 이러한 발전의 방향이 영원히 불가역적이라고 여긴다.

 

  체계 이론가들은 바로 헤겔의 결론인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예술의 진리 매개 가능성’에서 역전을 위한 힌트를 얻는다. 즉 헤겔이 예술의 종언을 선언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들은 예술의 진정한 실존 근거를 찾거니와, 예술을 진리 영역으로부터 ‘퇴출’시킨 헤겔의 전략은 이들에게는 오히려 오래도록 그것을 짓눌러 왔던 중책으로부터 예술을 ‘해방’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 때문에 근대 이후에 존속하는 예술은 헤겔에게는 ‘무의미한 잔여물’인 반면, 이들에게는 ‘비로소 예술이 된 예술’이다. 모든 외적 연관들이 차단됨으로써, 즉 일체의 예술 외적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자족적 체계로 분리 독립됨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선택권은 전적으로 예술에게 주어지며, 이에 따라 예술은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많은 것을 내용과 형식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체계 이론의 이러한 예술 해방 전략에는 석연찮은 점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일부 예술가와 예술 애호가들은 예술의 고유한 자립성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진리와 예술의 긍정적 연관을 매력 있게 정당화하는 담론을 미학에서 기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체계 이론 미학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렇게 평가되는 원인은 체계 이론 미학이 헤겔 미학을 전거로 삼으면서 그 원래의 핵심 주제를 방기(放棄)한 데 있다. 따라서 예술계의 중요한 요구를 충족하는 좀 더 의미 있는 예술론이 되려면 체계 이론 미학은 진리와 연관된 예술의 가치를 묻는 물음에 대해서도 긍정적 답변을 줄 수 있는 이론으로 성숙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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