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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읽는 과학과 사회

코스모스(Cosmos)

by Gosamy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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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과학을 크게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으로 나눈다. 학문들을 이렇게 나누고 개별 학문을 "과학"이라 부르게 된 것은 200년이 되지 않았다. 19세기까지도 사람들이 즐겨 쓴 말은 "철학"이었다. 오늘날 여러 과학 분야들에서 대학 공부의 마지막 단계에 '과학박사'가 아니라 '철학박사(*Ph. D ; Doctor of Philosophy)'를 준다. 이 점은 대학교에서 "과학"이라는 말 대신에 오랫동안 "철학"이라는 말을 썼음을 잘 보여준다. "동물학"을 예전에 "동물철학"이라 했고 "자연과학"을 "자연철학"이라 했다. 뉴턴도 자신의 물리학을 "자연철학"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그의 책 제목(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프린키피아)에 잘 나타나 있다. 볼츠만이 20세기 초까지 대학에서 가르친 주제도 자연철학이었다.

"과학"이라는 말이 유행을 타게 된 것은 "과학자(Scientist)"라는 말 때문이다. 다른 인도유럽 말들에서도 비슷한데 영어 "Scinece"는 "알다"를 뜻하는 움직씨를 이름씨 꼴로 바꾼 낱말이다. (*움직씨와 이름씨의 관계는 여기선 문맥 상 일본어에서의 음독과 훈독 간의 관계 정도로 받아들여도 될 듯 하다) "Science"는 일상 말에서 "앎" 또는 "지식"을 뜻할 뿐이었다. 하지만 1833년 영국의 철학자 윌리엄 휴얼이 자연철학자나 실험철학자를 특별이 "Scientist"라 부르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고 1840년에는 "과학자"란 수학자, 물리학자, 자연학자라 말할 수 있겠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말에 "Scientist"와 "Science"가 미국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고 20세기 초에 영국이 그 뒤를 따랐다. 한편 1874년에 일본의 학자 니시 아마네가 "사이언스"를 무심코 "과학(科學)"이라고 옮긴 뒤 낱말이 동아시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휴얼과 아마네가 지성사에서 나타난 여러 학문들을 어떻게 이해했든 우리가 "과학"이라 불렀던 학문들은 오랫동안 "철학"으로 불렸다는 점이 중요하다. "철학"은 그리스말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를 옮긴 말인데 이는 "알고 싶음"을 뜻한다. "필로소포스(philosophers)" 곧 "철학자"는 "알고 싶은 이"를 뜻한다.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아는 이"와 말싸움을 했다. "아는 이"는 그리스말로 "소피스테스(Σοφιστές)"인데 영어를 쓰는 이들은 이를 "소피스트(Sophist)"라 쓴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소피스트와 다투었던 까닭은 그들은 아는 이가 아니라 잘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이였기 때문이다. 앎을 얻으려고 애쓰는 이들을 "알고 싶은 이"라 부르는 것을 멈추고 드디어 "아는 이"라 부르게 된 점은 오늘날 과학자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만큼 사람의 앎들이 옛날에 견주어 크게 자라났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 알 수 있으며 더 알아야 할 것이 많다는 점에서 차라리 "알고 싶은 이"라 불리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몇몇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자들이 소피스트 곧 아는 체하는 이가 되지 않도록 삼가야 한다고 경고했다.

과학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여러 길이 있다. 하나는 과학 전통을 세우는 데 이바지한 이들의 탐구 과정을 따라가며 살펴보는 길이다. 다른 길은 앎의 본모습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길이다. 철학자로서 나는 우리가 자연, 사회, 우리 자신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묻는 길을 더 좋아한다. 과학의 씨앗이 말, 셈, 숫자, 글자, 말길이라면 이 씨앗으로 과학 전통의 새싹을 틔운 때는 언제이며 누구일까? 지구 곳곳에 새싹들이 나왔는데 우리는 그리스의 '피시올로고이'를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피시올로고이"는 그리스말로 "자연을 말하는 이" 곧 "자연학자"다. 이들은 앎의 대상을 "자연"으로 좁히고 자연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첫 자연학자는 터키 서해안의 밀레토스 지역에서 BCE624년에 태어난 탈레스다.

BCE6세기 무렵 노자나 그 제자가 쓴 것으로 알려진 <도덕경>에는 "하늘과 땅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스스로 그러하다"가 한자 낱말로 "자연(自然 ; 스스로 자, 그러할 연)"이다. "자연"에 해당하는 영어 낱말은 "Nature"다. "Nature"는 "자연 세계"를 뜻하기도 하고 "본성"을 뜻하기도 한다. "본성"은 매우 어려운 말인데 "갖고 태어난 본디 성깔" 또는 "됨됨이"를 뜻한다. "Natural"이라는 영어 낱말을 "자연스러운"이라 옮길 때 "자연 세계에 있는"을 뜻하기도 하지만 "됨됨이에 맞는"을 뜻하기도 한다. "Nature"와 "Natural"은 "태어나다"나 '자라다"를 뜻하는 라틴말 움직씨에서 왔다. 영어 낱말 "Physics"나 "Phisical"은 그리스말 "피시스(φύσις)"에서 왔는데 이것도 "됨됨이"를 뜻한다. 인도유럽 할머니말을 거슬로 올라가 "피시스"의 말뿌리를 찾아보면 "태어나다" "되다" "자라다" "나타나다"를 뜻하는 말이 나온다. 그리스의 피시올로고이가 "피시스" "본성" "됨됨이" "되어감"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그 이후 2600년의 과학 전통을 낳았다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니다.

"피시스"는 흔한 말인데 BCE8세기 무렵 쓰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일상 말로 나온다. "헤르메스가 땅에서 그 풀을 뽑아 나에게 주었다. 그는 나에게 그 풀의 피시스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피시스"는 "자라나는 방식" 또는 "됨됨이"를 뜻한다. 탈레스와 그의 제자들은 "피시스"를 "만물" 곧 "모든 것"을 뜻하는 말로 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자기 됨됨이대로 자라나기 때문에 피시스를 그런 뜻으로 썼을 것이다. 근처 에페소스에서 BCE535년에 태어난 헤라클레이토스는 '피시스'를 일의 처음과 가운데와 끝을 이끌어가는 힘으로 생각했다. 사물들이 가진 피시스는 사물들이 관계 맺을 떄 일어나는 일을 한계짓는다. 피시스에 따라 일어나는 일은 될 일이 일어난 일이고 '자연스런'일이다. 피시올로고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피시스를 따른다고 말한다. 달리 말해 피시스를 넘어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오직 자연스런 일만이 일어난다.

피시올로고이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그 이전 사람들과 매우 달랐다. 시를 쓴 이, 하느님들의 족보를 쓴 이 나라를 다스리는 이, 역사를 쓴 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사람보다 힘이 훨씬 센 하느님들이 세상일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그의 부하들, 이 이야기를 쓴 헤로도토스도 일식이 하느님이 일으킨 일이라 생각했다. 이들은 하느님이 끼어들면 하늘 해도 자기 자리를 벗어나 멋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시올로고이는 피시스를 벗어난 일을 자기들 이야기에서 되도록 줄이거나 없앴다. 피시스를 벗어난 일들을 치워버리고 자연스러운 일만을 남겨둔다면 세상은 가지런하게 꾸며진 세상이 될 것이다. 이런 세상을 그들은 "코스모스"라 불렀다.

그리스말 "코스모스"는 움직씨 "코스메오"에서 왔다. 이는 "가지런히 놓다" "꾸미다" "치우다"를 뜻한다. "화장품"을 뜻하는 "cosmetic"은 이 낱말의 흔적이다. 고전학자 그레고리 블래스토스에 따르면 '코스메오'는 지휘관이 싸움하려고 군인과 말들을 가지런히 놓는 일이며, 다스리는 이가 법질서에 따라 명령하는 일이며, 요리사가 맛있는 요리를 만드려고 식재료를 넣는 일이며, 더럽고 어지럽혀진 곳을 말끔하게 치우는 일이다. 치우고 가지런히 놓고 꾸밈으로써 만들어진 코스모스는 보기에 좋고 마음에 든다. 이런 뜻의 "코스모스"를 피시올로고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 되어가는 모든 것, 지금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낱말로 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코스모스가 모두에게 똑같다고 말했다. "이 코스모스는 모두에게 같으며, 하느님이나 사람이 만든 것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있었으며 있으며 끝없이 줄곧 있을 것이다. 알맞은 눈금에 따라 켜지고, 알맞은 눈금에 따라 꺼지는, 끝없이 살아 있는 불이다." 그는 불을 때때로 로고스(Logos) 곧 헤아림과 같게 여겼다. 이 로고스는 모든 것이 본디 됨됨이에 따라 일어나고 되어가고 생겨나도록 이 세계를 꾸민다. 세계를 코스모스로 여긴다는 것은 피시스를 따르지 않아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우리 이야기에서 없애버리겠다는 것을 뜻한다. 피시올로고이는 자기들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해하고 싶어 이 모든 일들을 다스리는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그들은 자연을 코스모스로 꾸미는 자연의 우두머리를 "아르케"라 불렀다. 이는 "우두머리" "으뜸" "처음" "다스림"을 뜻한다. "아르케(arche)"는 나중에 라틴말로 "프린키피움" 또는 "프린키피아"로 옮겨졌고 영어에스는 "Principle"이 되었다.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이를 "원리(原理)'로 옮긴다.

(김명석, <두뇌보완계획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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