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들어서면서 물리학은 크게 변모했다. 특히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등장은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데 이 두 예는 과학의 진보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물음의 관점에서 볼 때 상이한 특징을 드러낸다.
1905년 발표된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 같은 물리학의 개념들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물리학에 등장하는 여러 공식들을 고쳐 쓰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상대 운동에 관한 유효한 공식으로 승인되었던 속도의 덧셈 법칙도 이에 해당한다. 이 법은 시속 150km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반대 방향으로 시속 150km로 달리는 옆 선로의 기차를 볼 때 그것이 시속 300km로 도망가는 듯 보인다는 상식적인 사실을 설명해 주지만,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이와 같은 덧셈 법칙은 정확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물리학이 새 이론에 의해 완전히 부정된 것은 아니다. 특수상대성이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고전물리학의 식들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아무 문제가 없을 만큼 정확한 설명과 예측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앞에서 말한 기차가 만일 초속 15만km로 달린다면 새 이론과 고전물리학의 계산에 뚜렷한 차이가 나겠지만, 음속을 넘는 시속 1,500km 정도에서도 두 계산의 결과는 충분히 훌륭한 근사를 보여 준다. 특수상대성이론은 고전물리학의 설명력을 고스란히 포섭하는 반면, 고전물리학은 특수상대성이론이 설명할 수 있는 영역 중 '속도가 그다지 크지 않다면'이라는 조건으로 제한되는 영역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렇게 볼 때 특수상대성이론은 고전물리학을 포섭하면서 설명과 예측의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물리학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양자역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1910년대에 물리학자들은 원자에 속한 전자들의 동역학적 상태를 설명하려 했지만 고전물리학으로는 그런 설명이 불가능했다. 결국 물리학자들은 고전물리학과 양립 불가능한 전제들을 토대로 삼아 양자역학의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비로소 문제의 현상에 대한 정확하고도 일관성 있는 설명을 제공할 수 있었다. 원자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전자의 운동은 고전물리학으로 설명되는 반면, 원자 안의 전자를 설명하는 데는 양자역학이 필요하다. 원자 안의 전자가 충분한 에너지를 얻으면 자유로운 전자가 되는데, 마치 그렇게 풀려나면서 양자역학의 영토로부터 고전물리학의 영토로 건너오는 꼴이었다.
문제는 양자역학의 식들이 고전물리학이 효과적으로 설명해 온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양자역학의 등장이 물리학의 진보를 의미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양자역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당구공의 충돌 같은 현상이 고전물리학 고유의 영역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발달한 혼돈이론의 경우는 두 이론 간 관계의 또 다른 면을 보여 준다. 혼돈이론은 아주 미세하게 다른 두 초기 상태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발달해 가는지를 살피는데, 양자역학에서는 '아주 미세하게 다른 두 초기 상태'라는 개념의 의미가 명확히 규정될 수 없는 경우가 존재한다. 이는 혼돈이론이 고전물리학의 토대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양자역학과 고전물리학은 절묘하게 서로 연결된다. 원자에서 막 풀려나오는 순간의 전자에 대응되는 극한 조건을 가정하면 신통하게도 양자역학의 식은 고전물리학이 내놓는 식과 일치하는 형태를 띤다. 이는 각기 다른 현상 영역을 맡아 설명하고 있는 두 이론이 극한 조건 아래 두 영역의 경계에서 만나 매끄러운 이음매를 만들며 연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연결을 통해 고전물리학과 양자역학은 물리학을 구성하는 상보적인 부분들로 자리를 잡는다.
만일 고전물리학이 폐기되어 사라졌거나 고전물리학과 양자역학이 매끄럽게 하나로 연결되지 못했다면, 20세기 물리학의 진보에 대한 평가는 논쟁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물리학 전체를 놓고 볼 때 분명해진 사실은 양자역학의 등장 역시 물리학의 진보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고전물리학과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덕분에 우리는 '다채로우면서도 하나로 연결된 세계'에 대한 '다채로우면서도 하나로 연결된 물리학'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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