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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LEET 독서/논리학, 과학철학

더미의 역설 [2007학년도 MEET/논리학]

by Gosamy 2021.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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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더미의 역설'은 일명 '테세우스의 배' 문제와 동일한 형식의 역설이 나타난다. 테세우스의 배 문제란 테세우스를 기리기 위해 만든 처음 배의 판자를 하나씩 갈아 끼워 수리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모든 판자가 새로운 것(배 A)으로 대체될텐데, 어느 시점부터가 원래 테세우스의 배인지 결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또한 수리하기 위해 원래 배에서 떼어낸 판자들로 만든 배(B)가 원래 배와 같다면, A=B인 것인가?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dYAoiLhOuao)

 

  한 톨의 밀알이 곡식 더미를 이루는가? 아니다. 두 톨이면? 역시아니다. 세톨은? ······ . 그렇다면 만톨은? 밀알이 충분히 많이 쌓이면 곡식 더미를 이룬다. 하지만 한 톨만으로 더미가 안 된다면, 거기에 한 톨 더 보탠다 한들 여전히 더미로 보기는 어렵고, 이런 식이라면 만 톨이라도 더미라고 보기 어렵지 않겠는가? 이는 기원전 4세기 에우블리데스가 고안했다고 전하는 ‘더미의 역설(paradox of heap)’이다. 이러한 연쇄 논법 퍼즐은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역사적으로는 헬레니즘 시대에 회의론자들이 스토아학파의 독단적 인식론을 공격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대상에 대한 감각 인상이 대상과 일치한다고 우리가 동의할 때 지식이 성립한다. 이때 분명한 감각 인상은 동의를 강력히 유도하는 경향이 있고, 불분명한 감각 인상은 그리 강력하지 않다. 범인(凡人)들은 불분명한 인상에도 동의하면서 억측에 빠지는 반면, 인상의 분별을 단련해 온 현자(賢者)는 분명한 인상에만 동의하면서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회의론자들은 ‘더미의 역설’처럼 각각의 인상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흡사한 인상으로 점차 대치하면서, 분명한 인상에서 불분명한 인상으로 나아가는 연쇄 고리를 구성해 스토아학파를 공략하였다.

 

  모든 명제는 이 아니면 거짓이어야 한다는 ()을 스아학파는 저히 적용했다따라서 “n은 적은가?”, “n+1은 적은가?”라는 연쇄 형식의 질문에 대해아학파의 답은 .” 가 일정 수 계속된 다음느 시점에서부터는 아니요.”가 계 속되어야 한다만일 “n은 적은가?”의 답이 .”이고 “n+1은 적은가?”의 답이 아니요.”라면바로 그 n이 적은지적지 않은지를 가르는 기준점이 아학파는 그런 기준점이 있으며있어야 한다고 본다문제는 자도 정확한 기준점을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아 학도들은 아는 것만 진술한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한다그러니 .”라고 답한다면 그것은 자의 무지를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서 보았듯이 앎 곧 지식은 분명한 것에 대한 동의를 통해 성인식된 것은 분명하며 분명한 것 한 인식되는 경이 있다서 는 답은 분명하다’ 와 다름없는데아학파의 장에서 이는 다시 ‘n이 적은지가 분명하다는 것이 분명한 때에나 쓸 수 있는 답이다그러나 적음의 뚜렷한 기준점이 있다 해도, n이 적다는 분명한 인상과 n+1이 적다는 분명한 인상이 무 사할 때에는 분명하다.”라는 대답조차 하기가 해진다.

 

  분별력은 단련으로 상되지만 에 도달하지는 못한다서 련된 현자라도 때로 실수를 예방하고자 분명한 인상에도 동의를 삼간다그렇다고 그것을 상 분명하다고 판단했다가는 때로 실수할 자는 분명하다.”라는 말도 안하고 에 진다아학파의 제3대 수장 리시스는 러지에 다다르기 전에 말을 아당기는 똑똑한 마차에 자을 비유하며, 분명한 경우들의 끝에 이르기 전부터 침묵하라고 충고했다고 전해 온다. 이는 '예'가 답이 아닌데 "예."라 하는 것보다 '예'가 답이더라도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이니, 말하자면 지나침보다는 미치지 못함을 택하라는 정책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가 침묵할 때인가? 회의론자라면 의문이 생길 때마다 판단을 중지하면 될 것이다. 아마도 그 의문이 가실 리는 없겠지만. 크리시포스의 경우엔 분명한지 불분명한지를 분별할 수 없는 모든 경우에 침묵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언제가 그런 경우인지 때로 틀릴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분별 가능한지를 분별해야 하는 차원에서도 침묵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자꾸 소급하다 보면 미치지 못함이 지나침보다 더 낫다 할 것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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