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모든 학문 중에서도 최고의 지위를 지닌 제일 학문이라고 자처해 왔다. 이러한 자신감의 근저에는 철학적 앎이 최고의 확실성을 지니는 것이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 그러나 철학의 자기도취는 종종 철학 자체 안에서도 도전에 직면하거니와, 특히 회의주의가 그 도전의 중심에 있다. 궁극적 진리의 인식이 소명인 철학에서 의심을 생명으로 하는 회의주의가 수행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철학사 초기에 나타난 고르기아스의 세 명제는 회의주의의 고전적 전형이다. 그에 따르면 첫째,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 며, 둘째, 어떤 것이 존재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으며, 셋째, 어떤 것을 알더라도 우리는 그 앎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다. 반지성주의 성향의 사람에게 이 극단적 견해는 꽤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치명적 모순이 있다. 즉 고 르기아스는 첫째, 극단적 회의의 주체인 자신이 존재함을, 둘째, 아무것도 알 수 없음을 자신이 알고 있음을, 셋째, 아무것도 전달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자신의 앎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것을 부정하는 즉시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부정하게 되는 자가당착 에 빠진 것이다.
현대의 경우 극단적 회의주의는 알베르트의 '가류주의(可謬主義)'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특히 모든 철학적 명제의 생명을 좌우하는 '최종적 정당화'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함으로써, 최초의 자명한 명제에서 다른 명제들을 도출시켜 나가는 철학적 지식 체계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가 무기로 삼는 것은 뮌히하우젠 트릴레마(Münchhausen-Trilemm)이다. 이 트릴레마는 말을 타고 가다가 수렁에 빠진 뮌히하우젠 남작이 자신 의 머리채를 위로 잡아당겨 빠져나오려 했다는 우화를 빗댄 것이 다. 알베르트에 따르면 모든 하위 명제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 거가 되는 최초의 확실한 명제를 설정하려는 시도는 다음 세 오 류 중 하나를 반드시 범하게 되므로 궁극적으로 실패한다.
● 무한 소급 : 한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다른 상위 명제를 설정하지만, 이 제2의 명제는 제3의 명제를, 제3의 명제는 제4의 명제를 요청할 수밖에 없게 되는 식으로 상위 명제에 대한 요구가 끝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최종적 정당화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순환 논증 : 한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2의 명제를 끌어들이지만, 이 제2의 명제를 다시 제1의 명제를 통해 정당화하고자 하므로 이 역시 최종적 정당화로 볼 수 없다.
●절차 단절 : 계속되는 정당화 요구의 충족이 불가능하므로, 정당화 과정의 한 특정 단계에서 모든 논의를 중지시키고 하나의 명제를 절대 도전할 수 없는 도그마로 설정 한다. 이는 합리적 논변의 지속을 단절하는 것이므로 최종적 정당화로 볼 수 없다.
이 트릴레마의 위력은 실로 막강해서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철학적 정당화는 일견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명제 의 불확실성을 절대화하는 알베르트 역시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즉 그는 이 트릴레마의 ‘절대적 정당성’에 ‘최종적으로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확실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명시적 주장’과 ‘함축적 행위’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화, 즉 ‘수행적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수행적 모순의 발견은 뮌히하우젠 트릴레마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최종적 정당화가 가능함을 보여 주고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증명 방식이 바로 ‘귀류법적 증명’이다. 이 증명 방식은 명제 p의 모순 명제인 ~p가 언명되는 순간 ~p는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음을 밝힘으로써 p의 타당성을 우회적으로 증명한다. 즉 ‘확실한 인식은 없다’라는 알베르트의 명시적 주장은 ‘확실한 인식은 없다는 인식은 확실하다’라는 주장을 함축하므로, 그가 부정하려한 ‘확실한 인식은 있다’라는 명제를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증명 방식을 통해 우리는 가류주의적 회의에 맞서 확실한 명제들을 설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한다.
회의주의는 극단적으로 치달을 경우 오히려 자기 파괴로 귀결되므로 그 자체가 철학의 궁극적 사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칫 독단론에 빠지기 쉬운 철학에 대해 회의주의는 생산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회의주의의 강력한 도전은 철학으로 하여금 거기에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한 면역력을 갖춘 정당화 논리를 개발하도록 함으로써 철학의 건강성을 높이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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