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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LEET 독서/인문학

심신 동일론 [2010년 예비 PEET/인문학]

by Gosamy 2021.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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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드뇌 빌뇌브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49(리메이크작)> 원작은 <에이리언> 감독으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인데, 이 영화 또한 필립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을 원작으로 한다. 포스터는 주인장이 더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로 선정했다. 사실 이 영화를 꿰뚫는 주된 철학은 튜링 테스트이다. 인공지능과 인간을 구별하는 가장 좋은 기준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과도 접합지어 볼 수 있다. 물리적 조성이 전혀 다른 인간과 로봇에 대한 심신 상태의 동일성에 관한 논증을 우리는 받아들여야하는가? 또는 외형적으로 인간과 완전히 동일하더라도 외계인이나 로봇이라면 동일성의 축소를 인정하여 동일론자들의 재반박에 무게를 실어주어야 하는가? 이에 주인장은 후자의 주장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심신 동일론’은 심리 상태가 두뇌 또는 중추 신경계의 어떤 물리적 상태와 동일하다는 주장이다. 번개가 대기의 전기 방전이고, 온도가 입자의 운동 에너지인 것처럼, 우리가 여태껏 심리 상태라고 불러 온 것들은 실상은 두뇌 상태들이라는 것이다. 심리 상태의 여러 유형들과 두뇌 상태의 유형들 간의 상관관계는 신경 생리학이 발달함에 따라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 이러한 상관관계는 두 유형 사이의 동일성에 의해 가장 잘 설명된다.

 

  동일론자들이 말하는 심신 간의 동일성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 그 동일성은 동일한 종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적(數的) 동일성을 뜻한다. 예를 들어 “나는 네가 어제 산 시계와 똑같은 시계를 방금 샀어.”라고 말할 때의 동일성이 아니라, “그 시계는 내가 어제 잃어버린 바로 그 시계야.”라고 말할 때의 동일성이다. 둘째, 이 동일성은 개념적이고 선험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경험적인 동일성이다. ‘총각은 결혼 안 한 남자’는 개념적이고 선험적인 동일성이지만, ‘물은 H2O’라는 동일성은 경험적 연구를 통해 발견된 것이다. 예컨대, ‘통증은 두뇌 상태 S’라는 동일성은 ‘통증’이나 ‘두뇌 상태 S’의 개념적 분석이 아니라 신경 생리학의 연구를 통해 얻은 경험적 진리이다.

 

  수적 동일성은 “두 대상이 모든 속성을 공유할 경우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그 두 대상은 동일하다.”라는 라이프니츠 법칙에 지배된다. 통증이 두뇌 상태 S와 동일한 상태라면 이 두 상태는 모든 속성을 공유해야 한다. 어떤 철학자들은 공간적 속성을 들어 동일론을 반박하려 하였다. 모든 두뇌 상태는 물리적 상태이므로 특정한 공간적 위치를 갖지만, 많은 심리 상태들은 위치를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증과 두뇌 상태 S를 동일시하는 것은 5가 초록색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일종의 범주 착오라는 것이다. 수는 색깔을 부여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이 주파수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도 예전에는 터무니없는 말로 들렸으리라는 것을 생각해 보라. 동일론이 경험적 증거를 축적해 가고 신경 과학의 용어들이 일상화되어 가면서 심리 상태에 두뇌 상태를 연결하는 진술들의 의미론적 기이함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내가 두뇌 상태 S에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면서도 내가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으므로 통증은 두뇌 상태 S와 동일할 수 없다.”라는 반론도 라이프니츠 법칙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증은 이른바 내포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내가 두뇌 상태 S에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면서도 내가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라는 전제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두 개의 개념이 같지 않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경우가 동일론을 반박한다면 온도의 개념을 알지만 운동 에너지가 무엇인지는 모를 수 있다는 것이 온도가 입자의 운동 에너지라는 물리학의 동일성을 반박하는 셈이 될 것이다.

 

  데카르트 이래 제기되었던 동일론에 대한 많은 반론들은 답변이 가능하거나, 적어도 결정적인 반박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퍼트넘이 제기한 다수 실현 논변은 동일론에 대하여 결정적인 반박을 제시한 것으로 인정된다. 동일론이 옳다면 “통증은 두뇌 상태 S이다.”라는 진술은 법칙적 일반성을 갖는 진술일 것이다. 그렇다면 두뇌 상태 S를 갖지 않는 생물체는 통증을 가질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중추 신경계가 인간과는 매우 다른 연체동물도 통증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또 감각과 지능은 인간과 비슷한데 신경 계통은 실리콘 기반인 외계인도 법칙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통증’이라고 부르는 심리 상태는 신체를 손상하는 자극에 의해 발생하며, 공포나 분노 같은 다른 내적 상태를 낳기도 하고, 우리의 믿음이나 감정들과 결합하여 특정한 행동 반응을 산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과 물리적 조성이 전혀 다른 외계인이나 로봇도 인간과 기능적으로 동일한 심리 상태를 가질 수 있다. 환경의 여러 입력들에 대하여 그들이 인간과 동일하게 감응하고, 인간과 동일하게 분류될 수 있는 내적 상태들을 가지며, 입력 자극에 대하여 인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반응하면서, ‘환경적 입력들-내적 상태들-출력 반응들’의 연결도 인간과 동일하게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외계인을 만난다면 우리는 그들도 인간과 같은 심리 상태를 갖는다고 믿게 될 것이다. 심리 상태를, 그것을 실현하는 물리적 기반이 아니라 그 상태가 체계의 ‘환경적 입력들-내적 상태들-출력 반응들’에서 하는 역할로 정의하는 관점을 ‘심리적 기능주의’라고 부른다.

 

  심리 상태의 물리적 기반을 강조하는 동일론자들은 심리적 개념에 상응하는 신경적 기반이 종(種)에 따라 다르다고 말함으로써 이런 주장에 대응한다. 온도가 물체를 구성하는 분자 운동의 에너지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기체에서만 성립하고 고체나 플라스마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래도 기체에서의 온도가 그 기체에서의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와 동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서의 고통’은 두뇌 상태 S이고, ‘외계인에서의 고통’은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다. 이것은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는 범위가 축소된 동일성이기는 하지만 심리 상태가 결국 물리적 상태와 동일하다는 애초의 주장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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