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에서는 도덕적인 가치나 규범이 여타의 자연적인 사실과 동일하거나 그것으로 환원된다는 주장을 자연주의라고 한다. 자연주의는 과학의 검증을 받을 수 있는 사실에서 도덕의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 다윈이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간한 후, 스펜서는 진화론에서 도덕적 판단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자기 나름으로 해석하여 어떤 행위가 더욱 진화되면 도덕적으로 더 좋은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적자생존은 치열한 경쟁을 정당화해 주는 것이다. 당시에는 스펜서의 주장이 최신 과학 이론을 도덕과 연결시켜 주는 훌륭한 이론처럼 보였다.
그러나 1903년 영국 철학자 무어는 사실에서 가치를 끌어내려는 모든 시도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저지른다고 비판했다. 누군가에게 “A는 A인가?”라고 물으면 그 물음은 의미가 없는, 하나 마나 한 물음일 것이다. 반면에 “A는 B인가?”라는 물음은 의미가 있다. A가 B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A는 B인가?”라는 물음도 의미가 없을 때도 있다. A와 B가 같다는 것을 누구나 알아서 그 물음이 “A는 A인가?”라는 물음과 같을 때가 그렇다. 스펜서의 주장대로 ‘더욱 진화됨’이라는 자연적 사실이 ‘좋음’이라는 가치와 동일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더욱 진화된 것은 좋은 것인가?”라는 물음은 하나 마나 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진화된 것은 좋은 것인가?”라는 물음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물음을 들으면 “정말 그런가?” 라고 되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어는 ‘더욱 진화됨’과 ‘좋음’이 같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이 논변은 ‘좋음’을 어떤 다른 자연적 사실과 동일시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적용될 것이다. 이와 같은 무어의 논변은 자연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다고 받아들여졌다. 만약 무어가 옳다면 가치는 사실과 독립적이므로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은 도덕의 문제에 시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무어는 자연주의자들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받는다. 스펜서가 ‘좋음’의 정의를 찾고 있다고 해석할 때는 무어의 논변이 성립한다. 그러나 스펜서는 ‘좋음’의 정의를 찾은 것이 아니라 진화론을 이용하여 실제로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찾은 것이다. ‘더욱 진화됨’은 ‘좋음’의 정의는 아니어도 그 외연이 같을 수 있다. 그러면 “더욱 진화된 것은 좋은 것인가?”라는 물음은 의미가 있어도 ‘더욱 진화됨’은 ‘좋음’과 동일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춘원은 춘원이다.”라는 명제와 “춘원은 이광수이다.”라는 명제를 비교해 보자. 첫 번째 명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두 번째 명제에 대해서는 “정말 그런가?” 라는 의문이 생길 사람도 있다. ‘춘원’과 ‘이광수’는 정의 관계여서 동일한 것이 아니라 그 둘이 가리키는 대상이 동일해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좋음’과 ‘더욱 진화됨’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무어의 반자연주의 논변이 실패함에 따라 스펜서가 해석한 진화론이 도덕적 가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그가 다윈의 진화론을 잘못 해석했다는 지적이 있다. 다윈의 이론에서 진화는 특정한 목적을 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변화만이 있을 뿐이지 ‘더욱 높은’ 진화의 단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진화됨’이라는 개념이 과학적으로 틀렸으므로 ‘더욱 진화됨’은 ‘좋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결국 자연적 사실이 도덕적 가치와 동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애초부터 막을 수는 없다. 우리는 도덕 판단을 위해 자연적 사실을 참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자연적 사실이 곧바로 도덕적 가치를 대체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 자연적 사실이 과학적으로 옳은지 검증되어야 하고 또 도덕적 가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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